화해 물꼬 튼 남북 축구교류, 이젠 제 갈길 가는 ‘남남 축구’ 작성일 04-11 23 목록 <div class="ab_sub_heading" id=""><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 </div><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 </div><div class="ab_sub_headingline" style="font-weight:bold;"> 허진석의 스포츠 라운지 </div><div class="dim" style="display: none;"><br> </div></div> <div class="ab_photo photo_center"> <div class="image"> <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353/2026/04/11/0000055093_002_20260411002714578.jpg" alt="" /><em class="img_desc">북한의 축구감독 안세욱(왼쪽)과 필자. 1990년 겨울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아시아청소년대회가 열렸을 때 촬영했다. [사진 허진석]</em></span> <span class="mask"></span> </div> </div> 오래된 사진 한 장. 윗도리를 벗은 저분은 북한의 축구감독 안세욱 선생이다. 저분이 윗도리를 벗은 데는 사연이 있다. 하루 전, 나는 안 감독과 비슷한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을 찍었을 때는 1990년 겨울이다. 11월 3일부터 15일까지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아시아청소년대회가 열렸다. 대한민국이 15일 열린 결승전에서 북한을 누르고 1981년 이후 9년 만에 우승했다. <br> <br> 이 대회를 계기로 남북한이 단일팀을 이뤄 이듬해 6월 14일부터 30일까지 포르투갈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단일팀은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를 꺾는 등 선전한 끝에 8강까지 올랐다. 같은 해 5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단일팀이 여자단체 우승을 차지한 데 이은 쾌거였다. 이 흐름의 시작은 1990년 10월 평양(11일)과 서울(23일)에서 열린 통일축구대회였다. <br> <br> <b>한밤 찾아온 북 선수에 라면 끓여주기도</b> <br> <div class="ab_photo photo_center"> <div class="image"> <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353/2026/04/11/0000055093_001_20260411002714532.jpg" alt="" /><em class="img_desc">1990년 10월 11일 평양 능라도 5월 1일 경기장에서 열린 통일축구대회. 서정원(앞줄 왼쪽) 등 남북선수들이 경기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중앙포토]</em></span> <span class="mask"></span> </div> </div> 아시아청소년대회에 참가한 남북한 대표 팀의 숙소는 카르티카 플라자 호텔이었다. 나는 이때 북한 사람을 처음 보았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다음 해다. 해외 취재를 앞두고 장충동 자유센터에서 반공교육을 받던 시절이다. 나는 북한 선수단 관계자들을 상대로 자주 취재했다. 안세욱 감독, 문기남 코치, 김광호 단장 등과 대화했다. 북한 술도 얻어먹고, 내가 맥주를 사기도 했다. <br> <br> 남북 팀엔 강철·윤철·최철·박철 등 ‘철’로 끝나는 이름이 많았다. 얼굴을 익힌 다음 ‘철’들만 수영장에 모아 사진을 찍었다. 감시를 받았겠지만 내 방에 와서 라면을 먹고 간 선수도 있다. 한 친구가 한밤에 연락을 했다. “얘기 좀 하고 싶다”고. 나는 라면 두 봉지를 끓였다. 그는 말없이 라면을 먹었다. 그가 먹는 동안 나는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는 눈 인사만 하고 떠났다. 내가 싸준 라면 몇 봉지는 두고 갔다. <br> <br> 저 오래된 사진을 찍기 하루 전날, 나는 오전 마감을 끝내고 점심을 먹기 전에 잠깐 수영을 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안 감독을 보고 건너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 다음 인터뷰 기사를 만들어 팩스로 송고했다. 우리 사진기자가 전송한 사진을 보고 데스크가 호텔로 전화를 했다. <br> <br> “정신이 있는 놈이냐. 누가 기자고 누가 취재원이냐.” <br> <br> ‘아차’ 싶었다. 사진 때문에 기사까지 버려졌다. 단독이었는데 아쉬웠다. 다음날엔 점심을 먹고 나서 수영장 근처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셨다. 안 감독이 수영장 맞은편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자초지종도 말하지 않고 거두절미 요구했다. <br> <br> “감독님, 옷 벗어요.” “뭐이라?” “벗으시라고.” “갑자기 왜 벗으라는 거야?” “여러 말 하실 것 없습니다. 벗어야 해요.” “안 해. 못 하갔어.” <br> <br> 나는 짜증을 내면서(사실은 징징거리면서) 졸랐다. <br> <br> “아이 씨… 어젠 내가 벗었으니까 오늘은 감독님이 벗어야 할 것 아뇨.” “아, 그 소리니?” <br> <br> 그는 뭔가 이해하겠다는 듯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웃통을 훌훌 벗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여러분은 보고 있다. 이 사진은 다음날 스포츠 면에 실렸다. 서울에서 사진을 받아본 데스크가 얼마나 웃었을까 생각하니 낯이 뜨거웠다. 안 감독도 그 사진이 대한민국 신문에 실리리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나는 그가 나를 배려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우리 기자들은 북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취재하지 않았다. <br> <br> 안 감독이 어디서 뭘 하는지 나는 모른다. 안 감독은 나중에 코리아 단일팀의 코치로 세계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말수가 적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물론 내면에는 단단한 ‘사상’이 들어 있었겠지. 김광호 단장도 생각난다. 내 원적이 함경북도 ‘어디’이며, 거기 남은 가족도 있을 것이라고 했더니 김 단장은 이름을 알려 달라고 했다. 나는 사촌의 이름까지 모두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았다. 벌컥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br> <br> “우리 집은 대대로 지주였던 데다가 아버지와 삼촌들은 기독교 학교를 나와 일본에 유학하고 학교 교장 선생도 한 집안이에요. 그런 사람들 싹 잡아다 아오지 탄광으로 보냈다면서.” <br> <br> 그러자 그들은 손사래를 쳤다. <br> <br> “에이, 아니야. 그런 거 없어….” <br> <br> 그러면서 김 단장은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면 할아버지와 큰아버지의 함자를 달라고 했다. 이듬해 코리아 단일팀이 서울에서 훈련할 때도 그를 만났다. 그 때 다시 물었지만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일정을 끝내고 출국하기 전날 마주친 김 단장의 얼굴에 눈물이 비쳤다. 김 단장은 나를 부둥켜안았다. 뜨거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갔다. <br> <br> “야, 이제 보고 그만이구나야. 언제 다시 보간. 거저 건강하라우….” <br> <br> 안세욱 감독도 버스에 타기 전 나를 보고 다가와 손을 잡았다. 내 방에 와서 라면을 먹은 친구는 차창 너머 어딘가 먼 곳으로 무심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김 단장의 말처럼 우리는 서로 다시 보지 못했다. 노력했다면 소식 정도는 알 수 있었을까. 세월이 지나니 그때 그 시간들이 가끔 그립다. 이때의 경험은 나에게 북한 사람들과 북한 축구에 대한 선입견을 심었다. <br> <br> <div class="ab_photo photo_center"> <div class="image"> <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353/2026/04/11/0000055093_003_20260411002714633.jpg" alt="" /><em class="img_desc">2014년 인천AG 남북 축구 결승전. [중앙포토]</em></span> <span class="mask"></span> </div> </div> 남북의 축구 교류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 되었다. 여러 국제대회에서 맞붙었고, 2002년 9월 7일과 2005년 8월 14일에는 통일축구대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났다. 그때마다 남북의 선수들은 정정당당히 승부하되 형제애는 지켜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흔드는 일이 일어났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을 10월 2일 텔레비전으로 본 것이다. 내가 본 남북경기 가운데 가장 격렬했다. <br> <br> 북한 선수들이 그렇게 거칠게 경기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동안 북한 선수들은 속으로는 매우 이기고 싶어하면서도 겉으로는 우리 선수들에게 ‘동포’ 대접을 해 주었다. 넘어지면 일으켜 주고 미안하다고 했다. 다친 선수에게는 괜찮으냐고 물었다. 이번엔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발을 든 채 날아들고 팔꿈치로 얼굴을 노렸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제 우리는 완전히 남이 되었구나….” <br> <br> <b>2002·2005년 통일축구로 정점, 그 뒤 빗장</b> <br> 거친 모습은 그들의 현실을 반영했을까. 내가 만난 북한 사람들은 늘 같은 말을 했다. “남녘동포들이 미제(美帝)의 압제를 견디느라 고생이 많다. 참고 견디면 우리가 해방시켜 주겠다.” 인천에 온 북한 선수들은 전에 본 북한 사람들과는 달라 보였다. 그들을 맞는 우리도 변했다. 관중은 우리 대표 팀을 일방적으로 응원하고 북한 선수를 야유했다. <br> <br> 북한은 완전한 타자(他者)로서 일본이나 중국 팀과 다름없는 상대가 되었다. 북한 윤정수 감독이 보여준 적개심과 폭력적인 언행은 충격적이었다. “승리로써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의 믿음과 사랑에 보답하겠다”던 그는 한국과의 결승전에서 판정에 불만을 품고 난동을 부려 아시아축구연맹(AFC)의 중징계를 받았다. ‘통일축구’ 1세대인 그가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으리라. <br> <br> 북한 축구가 한국을 마지막으로 다녀간 지 12년이 지났다. 남북관계는 얼어붙었다. 북한을 지배하는 남매는 험한 말을 일삼으며 판문점에 빗장을 질렀다. 가장 가슴을 뜨겁게 하는 스포츠, 만능키 같았던 축구도 신통력을 잃었다. 남북의 축구도 제 길을 갈 뿐이다. 우리도 앞가림하기 바빠 한반도 전체를 시야에 넣지 못한다. 월드컵을 두 달 앞두고 대표 팀 감독을 바꾸라는 판이다. <br> <br> 최근 북한 축구팀이 수원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의 여자챔피언스리그 4강전과 결승전 개최지가 한국으로 결정됐고, 예정대로라면 북한의 ‘내고향여자축구단’이 5월 20일 오후7시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수원FC 여자팀과 준결승전을 치른다는 것이다. 수원FC 여자팀은 8강전에서 중국의 우한을 4-0으로, 내고향은 베트남의 호찌민을 3-0으로 이겼다. 내고향여자축구단은 수원에 올까. <br> <br> 우리 축구협회도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다. 북한 팀이 한국에 오려면 통일부에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정부에서 승인하지 않을 리 없다. 축구협회는 북한 팀의 참가를 전제로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내고향 팀이 온다면 가슴을 졸이며 관전할 것 같다. 북한 선수들이 축구다운 축구를 할지, 우리 관중이 조건 없이 박수를 보내 줄지. 축구 말고 다른 일은 없을지. <br> <br> <div class="ab_photo photo_center"> <div class="image"> <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353/2026/04/11/0000055093_004_20260411002714692.jpg" alt="" /></span> <span class="mask"></span> </div> </div> 허진석 한국체육대 교수. 스포츠 기자로 30여 년간 경기장 안팎을 누볐으며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지냈다. 2023년 한국시문학상을 수상하고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다. <br><br> 관련자료 이전 '세계 최강' 中 탁구, 미래가 사라졌다…WTT 대회 '패패패패패승'→유망주 '줄줄이 탈락' 대참사 04-11 다음 2차전 오심 논란에 "심판들이 올바른 결정 내렸다"…대한항공 주장 정지석의 한 마디 04-11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