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항쟁 영화 지원했던 작가주의 거장, 정진우 감독 별세 작성일 02-09 24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감독 ·제작 ·기획자로 200여 편 한국 영화 제작에 참여</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Uz3kuosA0Y"> <p contents-hash="2c371bfcc9b0a6df8a1dc5d38006640aa67f6223bb59936c2a9cce058a3d1a8d" dmcf-pid="uq0E7gOc7W" dmcf-ptype="general">[성하훈 영화저널리스트]</p>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dd5be211db161cc185f1897d91141fc1d4f4fa19e653ff9deb38417a43452897" dmcf-pid="7BpDzaIk0y"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602/09/ohmynews/20260209152726887ycyd.jpg" data-org-width="1280" dmcf-mid="098S8mGhuH"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09/ohmynews/20260209152726887ycyd.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strong> 2024년 1월 한국영상자료원 50주년 기자회견에 참석한 정진우 감독</td> </tr> <tr> <td align="left">ⓒ 한국영상자료원</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3afa7a8eaed0fd63454670e88c07a3c08896e3b8c1c2fb25053f979e2895c519" dmcf-pid="zbUwqNCE0T" dmcf-ptype="general"> 한국영화 원로 정진우 감독이 8일 저녁 별세했다. 향년 88세. </div> <p contents-hash="fb55d71a69d08ff806b2cee8916c5339b1b48587cc6232c1863feb595845f63f" dmcf-pid="qKurBjhDzv" dmcf-ptype="general">정진우 감독은 지난해 고령에 따른 낙상사고와 코로나19 감염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투병해 왔다. 최근 같은 시기 영화계에 들어온 동료 김지미, 안성기 배우의 잇따른 별세에 깊은 상실감을 나타내기도 했다.</p> <p contents-hash="bce7d1b08a060131dcc2c0ae16a2965d4f7f300018f77001b99fef06cb367eff" dmcf-pid="BKurBjhDuS" dmcf-ptype="general">1937년 1월 17일 김포 태생인 정진우 감독은 한국영화의 전설과도 같은 감독이었다. 김포농고 연극반에서 활동하다가 연극부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중앙대(법학과)에 진학한 것이 영화계에 들어온 계기가 됐다. 1958년 연극부 선배였던 최무룡 배우의 주선으로 영화계에 발을 디뎠기 때문이다.</p> <p contents-hash="4a5162f9edd1e790b4d62583204f7082ed9be3e9115a3d1e0492f3796932e8c2" dmcf-pid="b97mbAlwFl" dmcf-ptype="general">초반에는 박상호 감독의 <장미는 슬프다>에서 강범구 촬영감독의 조수로 일했고, 이후 한국 액션영화의 거장인 정창화 감독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다 25세인 1961년 연출한 <외아들>로 데뷔한다. 한국영화 최연소 감독이었다.</p> <p contents-hash="07b8095fc7da62d3d9e008b5b5bb9c85c3325fe355d0fa2b4fc131fd3819c1ec" dmcf-pid="K2zsKcSrph" dmcf-ptype="general">그는 한국영화에서 예술성을 중요시한 작가주의 감독이었다. 1966년 <초우>는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며 정진우 감독을 영화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그의 영화는 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p> <p contents-hash="19e5d33a9bd49d74ba618097e10a3662d1571d5a2434e1f73d71e583dbaf4b0a" dmcf-pid="9VqO9kvm3C" dmcf-ptype="general">대표작 중 하나인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 등은 높은 예술성과 함께 향토성 짙은 미학이 드러난 작품이기도 하다. 평론계로부터 '정진우의 향토물은 주인공들의 삶의 공간이 다를 뿐 부당한 힘의 횡포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가정신은 일맥상통하게 향토물의 모든 작품세계를 관통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p> <p contents-hash="15205ef322f501bfc57baff00cffc8659f3ce2c49cc243d0bc81d07982fdc136" dmcf-pid="2fBI2ETsFI" dmcf-ptype="general">1973년에는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전신) 이사로 한국전쟁을 다룬 대작 영화인 임권택 감독 <증언>을 기획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제작비 몇 배에 달하는 비용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외국영화와 견줄 수 없었던 한국영화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작업이었다고 말했다.</p> <p contents-hash="c1a79075965f781b95201604bd2074c21ac7f3467dbee0a15c9e73ae4ab00bb1" dmcf-pid="V4bCVDyO7O" dmcf-ptype="general">역사의식을 담은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1970)은 일제에 대한 반제국주의 의식을 나타냈고 <국경의 밤>(1970년)은 분단된 민족의 비극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렸다. <동백꽃 피고지고>(1970년)는 일제에서 6.25를 거친 근현대사를 통한 한민족의 한 맺힌 마음을 평범한 가족 이야기를 통해 풀어 갔다. 김수남 평론가는 2008년 남긴 글에서 '정진우 감독은 척박한 한국 근현대사의 극복을 위해 일제 침략과 동족상잔의 6.25동란으로 겪어야 했던 민족의 비극사를 그의 역사의식으로 조망했다"고 평가했다.</p> <p contents-hash="939b16ee5f22d7f78b8dc0e18e73456581dab4006a976946fa162caadc4cc042" dmcf-pid="f8KhfwWIzs" dmcf-ptype="general">그의 작품들은 1971년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으로 제10회 대종상 영화제 우수계몽영화상영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70년대 말에서~1980년 중반까지는 거의 매해 상을 받을 만큼 국내 영화상 단골 수상자였다. 2014년 대종상 공로상, 2015년 영평상 공로상, 2019년 춘사영화제 공로상을 수상하며 한국영화 원로로 예우받았다.</p> <div contents-hash="c400187bb9b1f3c5a4e4ef96aec583e83912e2a415a0a9552d57d2c4b6d7b89a" dmcf-pid="469l4rYC0m" dmcf-ptype="general"> <strong>복합상영관 시대 열고, 혁명기 소련영화도 수입</strong>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c2aa102501be3b65555fb94912548dea7376a5836dff16c7476fe5ec768b922c" dmcf-pid="8bUwqNCEpr"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602/09/ohmynews/20260209152728173lxux.jpg" data-org-width="1280" dmcf-mid="pdUwqNCEzG"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2/09/ohmynews/20260209152728173lxux.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strong> 1969년 우진필름을 설립한 정진우 감독</td> </tr> <tr> <td align="left">ⓒ 우진필름</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f0a13e40cad7f87fc7d1b1ae58e5886220f403eba5e20d2833605731d12fb7e5" dmcf-pid="6KurBjhDpw" dmcf-ptype="general"> 정진우 감독은 한국영화 세계화를 강조하며 기술적 개선을 위해서도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그는 <율곡과 신사임당>(1978년)에서 동시녹음을 시도하여 후시녹음을 전적으로 하였던 한국영화 제작풍토를 쇄신하는 데에 앞장섰다. 여기에는 <섬개구리 만세>가 1972년 제 23회 베를린영화제에 참가할 때 인도영화에 밀린 경험이 작용했다. 인도 레이의 <천둥소리>가 수상하고 <섬개구리>는 후시녹음 때문에 대사와 입이 안 맞는 영화라고 현지 언론에서 망신을 당하면서 기술 능력 향상에 나선 것이다. </div> <p contents-hash="a035dd9e2e33d138f2b23aba65fafb56dcf131b8b8e6265b4e1bd03418aa35ab" dmcf-pid="P97mbAlw0D" dmcf-ptype="general">1969년 설립한 제작사 우진필름을 통해 윤여정 배우의 데뷔작인 김기영 감독 <하녀>(1970)를 포함해 100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했고, 1985년 강남 씨네하우스를 개관해 복합상영관 시대를 선도했다. 1985년 영화법 개정 과정에서 제작 문호를 넓히는 데 이바지했다.</p> <p contents-hash="e779585dc93bd5ab0a4567b52a79480b363969d2a296b7703c2bc9a7a003af54" dmcf-pid="Q2zsKcSruE" dmcf-ptype="general">1988년에는 혁명기 소련영화인 수입해 국내에 공개했다. 몽타쥬 기법으로 유명한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 <전합 포텐킨>을 비롯해 < 10월 > <파업> 등을 소련영화수출입공사와 직접 계약해 9편의 영화를 직수입했다. 한국과 소련의 정식수교가 1990년 9월 30일 체결된 이전부터 소련 영화계와 유대관계를 맺었다. <전함 포템킨>의 상영은 1991년 당시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에서 불가 판정이 났으나, 이후 1994년 상영의 길이 열리면서 국내 관객들과 만났다.</p> <p contents-hash="357936c871f5b3ec62a164c0ef239d5215b324938059fce265d65bbe53b8be30" dmcf-pid="xVqO9kvmUk" dmcf-ptype="general">보수적인 원로였지만 검열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겪었기에 영화의 기본인 창작과 상영의 자유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자세를 잃지 않았다. 시대적으로 의미 있는 영화의 제작을 돕기도 했다.</p> <p contents-hash="790e0182f2d75c3824554facc94170d41d3c25a25243134fffc401c0c9f91e6a" dmcf-pid="yID2s7PK7c" dmcf-ptype="general">1987년에는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김태영 감독 <황무지> 제작비를 지원했다가 보안사(현 방첩사)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는 생전 "당시 군사독재 시절 희생된 분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 몰래 영화 제작비를 줬던 건데, (이 사실이) 정보기관에 드러난 것"이라고 밝혔다.</p> <p contents-hash="a62ef28d48059fc2160bec96c48072fce78539e5d582d873ad975fb7199b8a57" dmcf-pid="WCwVOzQ9FA" dmcf-ptype="general">2014년 부산영화제가 정치적 탄압을 받을 때 창작과 상영의 자유를 흔들려는 시도를 비판했다. 아울러 대기업 독과점 문제 등에 대해서도 한국영화의 대응이 약하다고 지적하는 등 말년에도 한국영화 성장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나타냈다. 원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p> <p contents-hash="950b7f072a0967bf44affb7c892f447b3d7c20e4956b0df72f51095af59a7edc" dmcf-pid="YhrfIqx2Uj" dmcf-ptype="general">영화인복지재단 이사장으로 원로영화인들과 영화인 자녀들의 학자금을 지원하는 등 7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국영화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p> <p contents-hash="1e525db18b8c6384c7cca5075dfc5d49b4546d6f80f5c1311106410bce233997" dmcf-pid="G0ZaFdEopN" dmcf-ptype="general">한국영화인협회 양윤호 이사장은 "영화를 향한 타협 없는 고집과 열정, 파격적인 소재와 과감한 연출 이면에는 검열의 벽에 부딪히면서도 창작의 자유를 지키려 했던 투철한 예술가 정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영화가 세계무대에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영화법 계정과 산업화에 앞장섰던 진정한 리더셨고. 우천 속에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그 집념과 영화인들을 위해 닦아놓은 길은 이제 한국영화가 세계를 제패하는 밑거름이 됐다"고 고인을 추모했다.</p> <p contents-hash="ca32708316e416d45f4aeb7ecf74fc8b6f4b1fa296dcc6c1f93b1839ae75d30d" dmcf-pid="Hp5N3JDg7a" dmcf-ptype="general">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0호실에 마련됐다. 11일 오전 발인한다. 유족은 아내와 아들, 두 딸이 있고,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한국영화인협회는 한국영화감독협회, 한국영화인원로회, 한국영화인복지재단이 함께 장례를 주관한다고 밝혔다. 임권택 감독, 이장호 감독, 이해룡 원로배우가 명예장례위원장을 맡고, 양윤호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이 장례위원장을, 한국영화감독협회 심재석 직무대행이 집행위원장을 맡는다.</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강다니엘, 입대 전 ‘까까머리’ 공개 “군대 잘 맞을 것 같아…입대해 후련” 02-09 다음 '휴민트' 박정민 "女 설렘 포인트? 그냥 착각" [인터뷰 스포] 02-09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