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길 수 있는 곳에서 싸운다' 준비된 승자 이순신 작성일 12-22 7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리뷰] KBS1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4utPLRPKpX"> <p contents-hash="ac403aed2c72aac5fe32a271a9e43c867ed7403d73afe43b190d4942498d61a6" dmcf-pid="87FQoeQ9zH" dmcf-ptype="general">[이준목 기자]</p>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c25f460d2ba052ef4360c990f25bb5cfddcea2d1a9a78c2255f97f08974a77a3" dmcf-pid="6dPDSsDg7G"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2/22/ohmynews/20251222115248510mlxl.jpg" data-org-width="1280" dmcf-mid="VJTfdPfzU5"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22/ohmynews/20251222115248510mlxl.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strong> 이순신</td> </tr> <tr> <td align="left">ⓒ KBS1</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7d0a795bd92eb912b477cabdf3393b6882c5cb2542614f765713e8e882382160" dmcf-pid="PJQwvOwauY" dmcf-ptype="general"> 한산도 대첩은 1592년 8월 14일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대파한 전투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거둔 가장 큰 승전이자, 불리하던 전황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날, 이순신의 바다가 된 한산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 </div> <p contents-hash="c461bb6e58ac6f470dd7f3d8ce951493c2d47367a9b3f5c27a9d1553474da7b4" dmcf-pid="QixrTIrNUW" dmcf-ptype="general">12월 21일 방송된 KBS1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에서는 '세기의 전쟁 3부작'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로 '한산, 이순신의 바다'편이 그려졌다.</p> <p contents-hash="77ea7ac4d1fa21fd32999da828aa109b30461d38a9c68e6e55924117960c90bf" dmcf-pid="xnMmyCmj0y" dmcf-ptype="general">1592년 일본의 최고 권력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킨다.<br>전국시대의 풍부한 전쟁경험과 신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후 불과 20일 만에 파죽지세로 수도 한양까지 진격해왔다. 건국 이후 200여 년간 대규모 전쟁이 없었던 조선은 일본의 기습적인 전면전에 대응할 만한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국왕 선조는 수도를 비우고 북쪽으로 몽진(피난)을 떠나야 했다.</p> <p contents-hash="e29c85980f858b33a4986885bdc44320324d7dd84f86312bc6f27b5232d68c78" dmcf-pid="y5WKxfKpUT" dmcf-ptype="general">일본의 전략적인 목표는 '수륙병진' 전략을 통하여 해상과 육상에서 협공으로 조선을 완벽히 장악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육군이 빠른 속도로 북상하면, 수군은 남해와 서해로 진출하여 제해권을 장악하고 육군에게 병참지원을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p> <p contents-hash="05c5ce600f8ed12135a249a19c9b7f9818a613163e44c8c9d3aeb7e99458badd" dmcf-pid="W1Y9M49UUv" dmcf-ptype="general">하지만 조선의 바다에는 이순신이 있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개전 1년 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했고,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예측하고 실전과 같은 전쟁 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각지의 조선군이 줄줄이 패퇴하는 동안, 이순신이 이끈 전라 좌수군만은 옥포 해전, 사천해전, 당항포 해전 등에서 연승을 거두면서 일본의 서해 진출을 저지했다.</p> <p contents-hash="1ac4871f716b769bc4d9bdb38c620b8e3e25d6cf7c2f43786babd99ed1475436" dmcf-pid="YtG2R82uzS" dmcf-ptype="general">이에 히데요시는 해상에서 일본군이 고전을 거듭하자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 세 장수를 소집하여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일본군이 내세울수 있는 최정예 병력과 장수들을 모두 동원한 것이었다.</p> <div contents-hash="490d1ad4c1d3a0b8fa5bbdde283bbdab67c1aed10551ddb558c6d18c81998fc1" dmcf-pid="GFHVe6V7zl" dmcf-ptype="general"> <strong>히데요시의 계획 무참히 박살낸 이순신</strong>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4a7fa7facb5fbc55459edecd47a2128e7a390db3448705c30b5a7314ffa5226b" dmcf-pid="HHvq69qFph"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2/22/ohmynews/20251222115249847jmmw.jpg" data-org-width="1280" dmcf-mid="ffHVe6V70Z"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22/ohmynews/20251222115249847jmmw.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역사스페셜</strong> 한산도대첩</td> </tr> <tr> <td align="left">ⓒ KBS1</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0ddd251616d4a50b7713679c18504cd2cc88b8d3a643565ddbe0bf4db7d7f935" dmcf-pid="XXTBP2B30C" dmcf-ptype="general"> 이순신은 한산도 남쪽 견내량에 70여 척의 일본군 함대가 출현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와키자카가 이끄는 일본군의 선봉대였다. 그는 한산도 대첩 약 한 달 전에 벌어지는 용인 전투에서 1600명의 일본군으로 5만 명의 조선군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린 용장이었다. </div> <p contents-hash="4683ea7bd374623578219dc273b2aaaa0dda10af6c7215b88c1547028afb59a3" dmcf-pid="ZZybQVb0zI" dmcf-ptype="general">음력 1592년 7월 8일 새벽,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원균의 경상우수영으로 구성된 조선 연합 함대가 견내량으로 출진한다.</p> <p contents-hash="6df58441fc1cd1181590c8198efe7e078c3327ae6dcf6af6ed39522caefbfd13" dmcf-pid="55WKxfKpFO" dmcf-ptype="general">견내량은 물살이 빠르고 폭이 좁으며 암초가 많은 지역이라 대규모 함선을 운영하고 해전을 치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해협이었다. 더구나 일본 수군의 세키부네에 비하여 규모가 큰 판옥선을 주력 함선으로 운용하던 조선 수군에게는 더욱 불리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순신은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곳에서 싸운다"는 원칙에 따라 작전을 구상했다.</p> <p contents-hash="b930ad019cb055411e8dbbf27576975752f86a6358bcd886387b29213ef4114f" dmcf-pid="11Y9M49Uzs" dmcf-ptype="general">이순신은 수하장수였던 방답첩사 이순신(동명이인)에게 다섯 척의 함대를 이끌고 나아가 일본군을 유인하는 임무를 내린다. 조선 수군의 선봉대는 일본군의 함대와 마주지차 도망치는 척 뱃머리를 돌렸다. 기세등등한 일본군은 넓은 바다까지 조선 수군을 추격해왔다.</p> <p contents-hash="2135d2da2171156fd6b04cea7a9d1e6f5ddc17ebff98cf6e5a6769b7cd00f324" dmcf-pid="ttG2R82uFm" dmcf-ptype="general">이순신이 준비한 비장의 전술은 '학익진'이었다 . 마치 학이 날개를 펼치는 듯한 모양을 연상시키는 U자 진형을 통하여, 적함대가 도주하는 것을 막고 측면에서도 공격이 가능한 해상 포위 전술이었다. 이순신은 일본군이 전세가 불리해지면 육지로 도망칠 것을 알았기에,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 완전히 섬멸할 계획을 세웠던 것. 마침 전투가 일어난 시기(양력 1592년 8월 14일)는 소조기(부산 국립해양조사원 분석)로서 일시적으로 한산도 앞바다의 유속이 잔잔해지며 조선 수군이 대규모 함대전을 펼치기에 최적의 환경이 마련됐다.</p> <p contents-hash="d555f12ed53988c0630b04aa6b24cac3afed4daf46ad206e20b79fe36b55a8fd" dmcf-pid="FFHVe6V70r" dmcf-ptype="general">임진왜란 초기 당시 일본군이 육지에서 연승을 거듭할 수 있었던 두 가지 원동력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발전한 '조총'과 '백병전'이었다. 긴 사거리와 높은 관통력을 자랑하는 조총은, 전통적인 냉병기가 주류였던 전쟁의 판도를 바꾼 혁신적인 무기였다. 또한 일본군은 풍부한 전투경험을 통하여 칼싸움 등, 근접전에서 매우 강했다. 해상전에서도 일본군의 기본 전략은, 원거리에서는 조총으로 공격하고, 근접전이 되면 배를 연결하여 도하한 일본군들이 백병전을 통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패턴이었다.</p> <p contents-hash="ff148f6ab543a687fe6e6d3b5f5d139c2de5ddd6efb32ca3a0676ff57c71f143" dmcf-pid="33XfdPfzFw" dmcf-ptype="general">개인화기와 백병전 능력에서 열세인 조선 수군의 대응 전략은, 화포와 함선의 기술적 우위를 최대한 활용한 원거리 공격이었다.</p> <p contents-hash="db27d216fba8db329e44b08eb8612943930edad8372a10a8953304c22d1c4376" dmcf-pid="00Z4JQ4qUD" dmcf-ptype="general">조선 수군은 거북선(귀선)을 전투에서 적극 활용했다. 거북선은 돌격선으로 선봉에서 적의 지휘선을 공격하고 상대의 진형을 흐트러뜨리는 임무를 수행했다. 거북선이 처음으로 전투에 등장한 것이 바로 한산도 대첩이었다. 해상 전투에서 초반에 적의 진형을 무너뜨리는 것은 승기를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내구성이 튼튼하고 천장에는 쇠못을 박아놓은 거북선은, 일본군의 조총 세례도 견뎌냈고 배 위로 올라타 백병전을 벌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일본군은 처음 경험하는 거북선의 위압감과 파괴력에 놀라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p> <p contents-hash="66e02bc015236edd25cc65cab81223d52a46f97097c6129364d7742c012fd412" dmcf-pid="pVqnEanQ3E" dmcf-ptype="general">또한 조선 수군은 함포의 화력에서 일본 수군에 비하여 확실한 우위에 있었다. 조선은 16세기 중반부터 자체적으로 대형 화포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현자통총, 지자총통, 천자총통 등 다양한 대포들이 수군의 주력 무기로 활용됐다. 일본군 조총의 최대 사거리가 150보(0.2Km)에 불과했던 반면 조선 함포의 사거리는 1km에 이르렀으며, 가장 대형무기였던 대장군전은 900보(약 1.3km)에 이르렀다고 한다.</p> <p contents-hash="1b6196685182426c1a1afea34c0eaf79a64b864659392658382b9f8fff0ce52d" dmcf-pid="UfBLDNLxuk" dmcf-ptype="general">일본군도 화포는 있었지만 주력선인 세키부네의 구조적 한계로 인하여 반동이 심한 대형화포를 운용하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반면 조선의 주력선인 판옥선은 화포의 무게와 반동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대형 선박이었다.</p> <p contents-hash="758cc92c02491aa60888d410e964263da4b4471b63dc7dac1ebb13837dec134f" dmcf-pid="u4bowjoMuc" dmcf-ptype="general">전문가들은 여기서 '임진왜란 당시 나약한 조선이 아무 대비도 못 하고 일본의 침공에 무력하게 당했다'는 고정관념에 일부 반론을 제기한다. 이순신같은 걸출한 인물들이라도 그의 재능과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과 시스템이 충족되지 않았다면 불패의 기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p> <p contents-hash="f71a16a193c82a71705e2d5cfe6c6f76e49b40622a518052c059485cf80d99fc" dmcf-pid="78KgrAgR7A" dmcf-ptype="general">김병륜 한국국방안보포럼 연구위원은 "군선과 화약무기 등이 임진왜란 반세기 전부터 준비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교훈이다. 국가에서 결정해서 '국가가 해야할 일'을 했다는 것, 그것이 이순신이 승리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됐다. 각각의 시대에서 '그 시대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미리 준비하는 과정'이 가지는 의미가 작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음미해야 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p> <p contents-hash="6cca2e2b48ed250c835f0361af6db68c4e31d3e55e6902deee0bf8df411d6155" dmcf-pid="z69amcaepj" dmcf-ptype="general">한산도 대첩 당시 조선 수군은 거북선이 선제 공격에 나서서 일본군의 선봉선을 파괴하며 진형을 교란했다. 뒤에 따르던 일본 군선들은 타력(원래 항해하던 힘)에 의하여 가까이 엉키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는 학익진으로 포위하고 있던 조선 수군에게는 자연스럽게 화포를 집중시켜 명중률을 더 높일 수 있는 탄착점을 형성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수군은 적선 63척을 불살버리고 왜적들을 무찔렀다'고 기록되어있다. 반면 조선 수군은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았다. 조선 수군의 완벽한 대승이었다.</p> <p contents-hash="ce92c66eadf177e8dabf44ffd58124751d165f71f5ab4abbc1e23357700790f0" dmcf-pid="qP2NskNdFN" dmcf-ptype="general">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남은 병사들과 섬으로 도주했다. 와키자카는 조선군의 추격이 두려워 섬에서 소나무 꽃가루와 해조류를 캐먹으며 연명했다. 훗날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당시의 굴욕을 잊지 않기 위하여 패전의 기록을 가문의 역사기록으로 자세히 남겨두었다고 한다.</p> <p contents-hash="973fb2d5cf56c604930d524afa177e8b32d43479d46a10cc6ddaf673d6142800" dmcf-pid="BQVjOEjJ7a" dmcf-ptype="general">이순신의 조선수군은 북상하여 다시 안골포에서 구키와 카토의 일본 주력군을 모두 격파하는 대승을 거둔다. 조선과 일본의 수군이 서로 주력으로 맞붙은 최초의 전면전에서 그야말로 완승을 거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산도 대첩이다.</p> <p contents-hash="af2d00bb7b4bc0165c910172bfb1235f927e4c5bfe8c97b881acb165d127a016" dmcf-pid="bxfAIDAipg" dmcf-ptype="general">조선 수군은 한산도 대첩의 승리로 남해의 제해권을 완벽하게 장악했고,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순신은 이후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불패의 신화를 이어가며 조선을 전란의 위기에 구해낸 '성웅'이자 '충무공'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p> <p contents-hash="3c39cc7cfe1e9a521294f2d779f33d1c9c1ada431bbc89f25a91a9ca46602e09" dmcf-pid="KM4cCwcnuo" dmcf-ptype="general">전란이 끝나고 난 후, 조선 국왕 선조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에게 "이순신과 함께 전쟁을 해보니 어떤 인물이었소?"라고 질문했다. 이에 진린은 "보천욕일(補天浴日 찢어진 하늘을 꿰매고, 빛을 잃은 해를 깨끗이 씻어내다)"이라는 단 네 글자로 답했다고 한다. 그만큼 이순신이 하늘과 땅을 경영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갖춘 위대한 인물이었다는 의미다. 이는 이순신 사후 200여 년이 지난 1794년, 정조가 이순신을 기리며 지은 비문에도 다시 등장한다.</p> <p contents-hash="0e455817bdab4c9895dfca56b6ddd964e96293b0808c20ceee664f13056d7a7c" dmcf-pid="9jnlZylwpL" dmcf-ptype="general">또한 유홍준 국립박물관장은 "이순신은 전란이 없을 때의 모습이 더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하며 "전쟁이 일어나면 바로 투입될수 있는 모든 철저한 대비를 미리 해놓았다. 한산대첩은 학익진에 의한 승리 못지않게, 이순신 장군이 그것을 1년, 2년 미리 대비했던 모습에서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p> <p contents-hash="0c04910b86bcc38840c9a2804a2b4b83e1d49a303a8dcb182c2626d7d0631b62" dmcf-pid="2ALS5WSrun" dmcf-ptype="general">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도 이순신은 시대가 혼란할 때마다 가장 먼저 이름을 떠올리는 위대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구국의 정신과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안목은, 오늘날의 후손들에게 이어지며 많은 교훈을 안겨주고 있다.</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대홍수’ 김병우 감독, 격한 반응에 “은퇴작인 줄? 호불호 이미 예상”[EN:인터뷰②] 12-22 다음 아픔 딛고 첫 대상후보..'말자' 김영희 "X밭 걷고 있다 생각했는데.." [스타이슈] 12-22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