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편의 영화, 4번의 결혼... 연기도 사랑도 열정적이었던 김지미 작성일 12-11 2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한국영화 1세대 스타 김지미, 85세로 별세... 선구자이자 신여성으로 한 시대 풍미</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8sxgknpXFs"> <p contents-hash="ac403aed2c72aac5fe32a271a9e43c867ed7403d73afe43b190d4942498d61a6" dmcf-pid="6E4JaR1ypm" dmcf-ptype="general">[이준목 기자]</p>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660fc81c35a5f5dde966a22a16aaa9613cb1297966da4cffa592d2d321ddff5f" dmcf-pid="PD8iNetW3r"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2/11/ohmynews/20251211140213968zhdy.jpg" data-org-width="1333" dmcf-mid="1XYnjdFY0F"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11/ohmynews/20251211140213968zhdy.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원로배우 김지미, 85세 일기로 별세</strong> 원로 영화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가 별세했다. 향년 85세. 사진은 2019년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서 팬들에게 인사하는 배우 김지미.</td> </tr> <tr> <td align="left">ⓒ 연합뉴스</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a8a88646a557da3e25ca29adc00a1364c02bbf37f0d4fd970f90cd2a461fc53b" dmcf-pid="Qw6njdFYpw" dmcf-ptype="general"> 한국영화계 1세대 스타 여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지미(본명 김명자)씨가 하늘의 별이 됐다. 지난 12월 10일 한국영화인총연합회와 한국영화배우협회 등은 "김지미가 지난 7일 오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향년 85세, 고인의 직접적 사인은 저혈압으로 인한 쇼크인 것으로 전해졌다. </div> <p contents-hash="ae4675a25634f888b7d4c9abd5f029089a959863484dde2bfd31f7685ab2c73d" dmcf-pid="xrPLAJ3GUD" dmcf-ptype="general">1940년 충남 대덕군에서 출생한 김지미는 어릴 때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며 외교관을 꿈꾸던 엘리트 소녀였다. 김지미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시기에 명동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거장 김기영 감독의 눈에 띄어 최초의 '길거리 캐스팅'을 당하면서 배우의 길에 처음 입문하게 된다.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에 보육원 보모 역할로 데뷔했을 당시 그녀의 나이는 불과 17세였다.</p> <p contents-hash="1cf278b892c4acda65873e65624db732a3abb28fea665b1f6a8f35297303929c" dmcf-pid="ybv1UXaeuE" dmcf-ptype="general">이후 김지미는 <육체의 길> <장희빈> <토지> <길소뜸>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1960~1970년대 한국영화계 최고의 인기 여배우로 인정받았다. 또한 청룡영화제와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 아시아태평양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등 다수의 국내외 영화제를 석권하며 연기력에서도 인정받았다.</p> <p contents-hash="e20bf58642c1dd704407d5fd9642e42d19b5e74907cf77745e5a45b04f784f33" dmcf-pid="WKTtuZNd0k" dmcf-ptype="general">1980년대엔 자신의 이름을 딴 영화사 '지미필름'을 설립하여 영화제작자로 변신했고, 1990년대에는 영화인협회 회장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영화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16년 제7회 대중문화예술상에서는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p> <div contents-hash="a8a1ed4818544f68d647aa79625a0e37e002c817f976361a026bd8e935909c16" dmcf-pid="Y9yF75jJpc" dmcf-ptype="general"> <strong>선구자이자 신여성이었던 배우 김지미</strong>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213f5696b9932d7159f75ee99b74f20bdc1dbf5b4009f68632e0bd187df21d5c" dmcf-pid="G2W3z1AiUA"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2/11/ohmynews/20251211140215431jvtu.jpg" data-org-width="3000" dmcf-mid="fSGLAJ3GuI"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11/ohmynews/20251211140215431jvtu.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한국 영화사 쓴 김지미 별세…향년 85세</strong> 작품 700여 편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계를 이끈 원로 영화배우 고 김지미(본명 김명자)가 별세했다. 향년 85세. 사진은 데뷔작인 '황혼열차'에 출연한 배우 김지미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KMDb 캡처)</td> </tr> <tr> <td align="left">ⓒ 연합뉴스</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b77e48da6f4aad749bafb1be1386369008c52f79e25e33d568ece320e061b786" dmcf-pid="HVY0qtcnUj" dmcf-ptype="general"> 김지미의 인생은, 배우로서는 한국영화사의 1세대 전성기와 변천사를 관통하는 '선구자'이자, 자연인으로서는 시대를 앞서서 한국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딛고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추구했던 '신여성'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div> <p contents-hash="099a2722ecd5bf36cf83be5da162acbe641bdd70963cdae9b001da1e12d09ab1" dmcf-pid="XfGpBFkLpN" dmcf-ptype="general">김지미가 배우로서 일찍부터 스타덤에 올라 오랫동안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고전미와 현대미를 아우를 수 있는 독보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0~1970년대 한국영화를 기억하는 많은 올드 영화팬들에게, 김지미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미녀의 대명사'로 통했다. 당시 활동하던 촬영 감독들에게서는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완벽하게 아름다운 여배우"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p> <p contents-hash="8751245d7795cb7f82e1f2e7a3f132150b8d9c3938416c7b0c06124ac8f312ea" dmcf-pid="Z0myZSe47a" dmcf-ptype="general">데뷔를 이끌어준 김기영 감독은 그녀에게 본명인 김명자 대신 '난초같은 아름다움'이라는 뜻을 담은 '지미(芝美)'라는 예명을 제안했다. 여배우로서 전성 시절의 김지미에게는 단순하게 '미녀'라는 수식어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특별한 아우라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이미지를 가진 여배우들이 대세였지만, 김지미는 사극과 현대극, 선역과 악역, 청초함과 관능미 등 어떤 배역을 맡겨도 그 이미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입체적인 외모'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p> <p contents-hash="4811244613a81d789cb27ca69862bbcd903a7dada53442eb88914b10c9b58f9d" dmcf-pid="5psW5vd83g" dmcf-ptype="general">1965년 <불나비>에서 복수를 위해 남성들을 유혹하는 민화진 역할은 이른 한국 영화사 최초의 '팜므파탈' 캐릭터로 꼽힌다. 또한 <선술집 처녀> <육체의 길> <장희빈>등에서는 모두 당돌하고 자기주장이 강하거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려는 주체적인 여성들을 자주 연기했다. 당시만 해도 여성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김지미는 영화를 통하여 '강인한 여성'에 대한 대리만족을 안겨줬고, 한국 여배우들이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의 표현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다.</p> <p contents-hash="2393ede8b84cd238a0c2eab4007a17d7030e73c83c641e1a0b57929e606d9aca" dmcf-pid="1UOY1TJ60o" dmcf-ptype="general">또한 김지미의 연기 스펙트럼은 결코 강인하거나 도발적인 여성 이미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동대문 시장 훈이엄마>(휴먼드라마), <특등신부와 삼등신랑>(코미디), <햇빛 쏟아지는 벌판>(액션) 등에서 비련의 여주인공이나 발랄한 캐릭터도 많이 연기했다. 대하극 <토지>에서는 30대의 나이에 60대 노인 역할까지 소화했다. 멜로·사극·미스터리·액션·예술영화까지 그야말로 출연 가능한 모든 장르를 섭렵했다.</p> <p contents-hash="4760ad507a1a29c1f1c29267f8edcbb428e40c72a4f571bf21450e34559a837a" dmcf-pid="tuIGtyiPpL" dmcf-ptype="general">김지미의 출연작은 현재 공식적으로 기록이 확인된 것만 370여 편, 김지미 본인은 두 배가 넘는 약 700여 편 이상에 출연하여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회고했을 만큼 방대하다. 이는 한편으로 1960년대 한국영화가 급성장한 반면, 체계적인 제작과 관리 시스템은 자리잡지 못하면서 인기배우의 무분별한 다작과 겹치기 출연이 범람했던 시대적 한계와 관련이 있다.</p> <p contents-hash="466bf58620f2f548808573e0b28ab637dce971e93bcefb98685d8bc12d3d87b1" dmcf-pid="F7CHFWnQ3n" dmcf-ptype="general">인기 배우 한 명이 1년에 30편 이상의 영화를 찍어야 하고, 한 편을 고작 2주 만에 완성하기도 하는 살인적인 일정 속에서, 김지미는 한편으로 작품성이 떨어지는 졸작에도 상당수 출연해야 했다. 이런 환경속에서 배우들이 캐릭터나 작품을 깊이 분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김지미 본인도 자신의 대표작을 꼽거나 연기한 캐릭터를 일일이 기억하는 데 난색을 표시하며 "내 작품은 전부 미완성"이라고 할만큼 시대적 한계에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p> <p contents-hash="ac11a5508cfa84c033dc2197ca0b524ff04f4bfd3ebb19dab4e20b7ae650df67" dmcf-pid="3zhX3YLx7i" dmcf-ptype="general">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미는 소모품처럼 이미지를 낭비하다가 잊혀지는 흔한 여배우의 길을 걷지 않았다. 실제로 전성기에 미모가 유독 부각되면서 오히려 가려진 감이 있지만, 김지미는 당대 그 어떤 여배우들과 비교해도 캐릭터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표현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다작을 통하여 단련된 풍부한 경험은, 그만큼 그녀가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의 폭을 넓혀주기도 했다.</p> <p contents-hash="986afe373ff39049b9205d904c830e3e7c19d03fad28f80a5976850559f3f91e" dmcf-pid="0qlZ0GoM0J" dmcf-ptype="general">김지미는 훗날 인터뷰에서 "나는 외모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본 배우"라고 주장하며 "아무리 예쁜 얼굴도 보다 보면 질리기 마련이다. 내가 외모에 안주하고 노력 안 했으면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라며 세간의 고정관념에 반박하기도 했다. 김지미보다 후대에 활동했던 인기 여배우들도 주로 대중이 선호하는 이미지에 안주하거나 세월의 흐름 속에 자연히 일선에서 밀려난 것과는 달리, 김지미는 중년을 넘겨 1980~1990년대 초반까지도 꾸준히 주연급으로 연기활동을 이어갈만큼 오랫동안 한국영화의 간판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p> <div contents-hash="c98224c387339065977fb2a69ad98fa8ff35231d263f52efdb8dcebf8af8d8b2" dmcf-pid="pBS5pHgRzd" dmcf-ptype="general"> <strong>'네 번의 결혼과 이혼' 파란만장했던 개인사</strong>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8cdcc93961b9f85dff54396f0c0065424de08f86c09eb1dc2dad0f83aa98fd35" dmcf-pid="Ubv1UXae7e"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12/11/ohmynews/20251211140216964ixse.jpg" data-org-width="3000" dmcf-mid="42owCk9U7O"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11/ohmynews/20251211140216964ixse.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한국 영화사 쓴 김지미 별세…향년 85세</strong> 작품 700여 편에 출연하며 한국 영화계를 이끈 원로 영화배우 고 김지미(본명 김명자)가 별세했다. 향년 85세. 사진은 영화 '인생은 나그네길'에 출연한 배우 김지미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KMDb 캡처)</td> </tr> <tr> <td align="left">ⓒ 연합뉴스</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38457d60575603a9d6227215e67b5619a6f20a72acb75cbb96acf89931551c6b" dmcf-pid="u2W3z1AiUR" dmcf-ptype="general"> 배우이자 영화인으로서 누구보다 화려한 길을 걸었던 김지미는, 개인사 역시 파란만장했다. '네 번의 결혼과 이혼'이라는 타이틀은 어쩌면 김지미의 연기경력보다도 더 대중들에게 자주 회자된 이슈였다. </div> <p contents-hash="183b8852b22a11a591517381c02ca947bf6ec1f3e93ecaf3c71975e5ccb59231" dmcf-pid="7VY0qtcn0M" dmcf-ptype="general">김지미는 데뷔 초창기 명콤비를 이루며 자신을 스타덤에 올려준 영화감독 홍성기, 당대의 정상급 인기배우였던 최무룡(배우 최민수의 부친), 7살 연하였던 '가황' 나훈아, 심장병 전문의 이종구 박사 등과 혼인생활을 거쳤으나 모두 파경에 이르렀다. 자극적인 남성 편력 이미지 때문에 8번의 결혼으로 유명한 미국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에 빗대어 '한국의 테일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정작 김지미 본인은 이런 비교를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p> <p contents-hash="4c3987c392b5fb9460009debb882a93394eb8eb20728b868d23e892cb100d5f5" dmcf-pid="zfGpBFkLUx" dmcf-ptype="general">하지만 일부 도덕적인 비난 요소와 별개로 보면, 김지미는 당시 보수적인 여성상을 원하던 사회 분위기와 타협하지 않고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을 추구했던 선구자적인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김지미는 실제 성격 역시 솔직하고 거침없는 영화계의 '여장부'로 유명했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다고 한다.</p> <p contents-hash="56d94e25703bf8aec8a6b12afd85c6147bd9e89e6773ce0e3ecd7fd340380661" dmcf-pid="q4HUb3Eo3Q" dmcf-ptype="general">비록 김지미의 개인사와 연애사는 당대 대중들에게는 손쉬운 가십으로 소비되었지만, 그녀는 대중의 시선과 평가에 결코 주눅들거나 숨지 않았다. 연애와 결혼에 있어서도 김지미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스스로 선택하고 이별하기까지, 항상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삶을 주도한다는 일관성을 지켰다. 이는 여성으로서는 시대를 앞서간 파격적인 행보였다.</p> <p contents-hash="f310e50455b9ae29efe8d9095d9b58c9e53e177a68d10f2cf8500d7c578b51d4" dmcf-pid="B8XuK0DgpP" dmcf-ptype="general">커리어 후반기를 차지한 '영화 제작자이자 행정가'로서의 행보도 김지미가 평생 추구한 주체적인 삶의 연장선에 있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영화가 침체기를 맞으며 에로티시즘 위주의 상업영화들이 범람했고, 김지미 역시 나이가 들고 캐스팅이 줄어들면서 반강제로 7년 가까운 공백기를 거쳐야 했다.</p> <p contents-hash="90466418240d56ca6eba45799b9b48f2e303c69b05acc899a830cf0a55ee5bd8" dmcf-pid="b6Z79pwa76" dmcf-ptype="general">하지만 김지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직접 본인의 이름을 딴 제작사를 설립하여 당시 최초의 '여배우 출신 1호 영화 제작자'로 또다른 영역을 개척했다. 김지미는 본인이 직접 제작하고 출연까지 한 <티켓> <길소뜸> 등의 영화를 통하여 자신이 진정으로 만들고 싶었던 사회성과 예술성을 지닌 작품을 연이어 선보였다. 김지미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 "배우로서 더이상 연기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나만의 방식으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기에 나는 '영화인'"이라고 정의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p> <p contents-hash="742c2851ae9fc562acdeb01cb832664707f9fdd81161d0a021243e2f20a19842" dmcf-pid="KP5z2UrNu8" dmcf-ptype="general">하지만 화려했던 커리어의 막바지에는, 급작스럽고 아쉬운 퇴장도 있었다. 1992년 제작과 주연을 맡은 <명자 아끼꼬 쏘냐>를 끝으로 김지미의 연기 커리어는 막을 내렸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불과 52세였다. 메릴 스트립, 김혜자, 윤여정, 나문희 등 김지미와 1940년대생 동세대 여배우들이 노년이 되어서도 다양한 배역과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온 것과 비교하면 아쉬운 선택이었다.</p> <p contents-hash="6f61728c35c2d8bdafb58dd5abf8d26eee680ad6f7a9f73d48a1a1980608c2bb" dmcf-pid="9Q1qVumjU4" dmcf-ptype="general">김지미는 배우경력을 사실상 마감한 이후에도 1995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1998년에는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역임하여 영화계에서의 활동을 이어왔다. 하지만 2000년대 초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지내다 중도 사퇴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영화진흥위원회 구성을 둘러싼 신구 영화인들간의 파벌 갈등 속에서, 소외감과 환멸을 느낀 김지미는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한국영화계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다. LA에서 손주들을 돌보는 평범한 할머니로 돌아간 김지미는, 조용한 말년을 보내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보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평범한 일상에서 비로소 안식을 찾았다.</p> <p contents-hash="805eb9a70f752ff1ebc1da10ad52efa2d6c18568c197952a517a2bedf551b5a7" dmcf-pid="2xtBf7sA7f" dmcf-ptype="general">지난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특별게스트로 초청되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영화계에서 그녀의 마지막 공식 석상이 됐다. 김지미는 여기에서 "여배우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일류가 돼야 한다. 그렇게 하면 남자와 여자 구별없이 좋은 배우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다. 훌륭한 연기자가 되려면 자존심과 자긍심을 갖고 최선을 다하여 연기해야 한다"는 철학을 전하며, 후배 여배우들을 위하여 프로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p> <p contents-hash="d84c345a0df7c4854010cefc7870f01a170e5d52a6b39e5986dc533c0d18219c" dmcf-pid="VMFb4zOc0V" dmcf-ptype="general">김지미는 누구보다 화려했지만 외로웠고, 강인했지만 그만큼 시대와의 불화도 겪어야 했던 배우였다. 1세대 여배우이자 영화인으로 남긴 '개척자'로서의 화려한 족적, 그리고 파란만장한 개인사나 영화계 세대교체 시기에 보여준 아쉬운 행보들도, 모두 '인간 김지미'로서의 솔직한 모습들이었다. 수많은 찬사와 논란을 뒤로하고 영면에 든 김지미가 남긴 700여 편들의 작품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강렬한 빛과 짙은 그림자가 동시에 공존하는 한국 영화의 역사로 기억될 것이다.</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세계로 뻗어가는 K-콘텐츠"…K-FAST 얼라이언스 참여사 68개 확대 12-11 다음 엔터사 인수→아이돌 컬래버, 아동 콘텐츠가 ‘황금열쇠’[김원희의 업앤다운] 12-11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