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형'은 '악법도 법'이라고 한 적이 없다 작성일 07-30 19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리뷰] tvN 벌거벗은></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V1Ks9jGku1"> <p contents-hash="ac403aed2c72aac5fe32a271a9e43c867ed7403d73afe43b190d4942498d61a6" dmcf-pid="ft9O2AHE05" dmcf-ptype="general">[이준목 기자]</p>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99a6616e603488015e13f3706ed45c528d91f6083820456f6d794dc6e8734c99" dmcf-pid="4F2IVcXDpZ"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07/30/ohmynews/20250730105708780uzql.jpg" data-org-width="1280" dmcf-mid="uITeGfc60z"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7/30/ohmynews/20250730105708780uzql.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벌거벗은세계사</strong> 소크라테스</td> </tr> <tr> <td align="left">ⓒ TVN</td> </tr> </tbody> </table>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1337710a62279c628f7c7a9878778a3941db4039cfc3331003f9fc9ae2b23157" dmcf-pid="83VCfkZw7X"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07/30/ohmynews/20250730105710062rxyd.jpg" data-org-width="1280" dmcf-mid="2BUcuilo3t"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7/30/ohmynews/20250730105710062rxyd.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벌거벗은세계사</strong> 소크라테스</td> </tr> <tr> <td align="left">ⓒ TVN</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47f798b5038358a518dde0531dfd5e8df595ea5c7a0fe66ac11e65aaa60168be" dmcf-pid="62JZiSqypH" dmcf-ptype="general"> '테스형'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다.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격언처럼, 소크라테스는 평생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끊임없는 질문을 통하여 삶의 의미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div> <p contents-hash="abbb3f9f3bd134e4c629914f37336a7766d577406894f96b97c36eaf3c312244" dmcf-pid="PVi5nvBWUG" dmcf-ptype="general">오늘날 공자, 예수, 석가모니 등과 함께 인류가 배출한 4대 성인의 반열에까지 오른 소크라테스지만, 정작 그가 활동했던 당대에는 민중의 미움을 사면서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안타까운 최후를 마감해야 했다. 과연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무엇이었을까.</p> <p contents-hash="9e3bc97efff4cd824eba83539cc56da40daaee25bc1f0fba25674e2ab7708a6d" dmcf-pid="Qfn1LTbYUY" dmcf-ptype="general">7월 29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소크라테스는 왜 독배를 마셨나'편이 그려졌다.</p> <p contents-hash="d44dcee0eb9cf4384642d930b082763d9af57ac38405aad5f3fd303cc5c3ca5f" dmcf-pid="x4LtoyKGzW" dmcf-ptype="general">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석공인 부친과 산파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소크라테스는 한미한 하층민 가문 출신에 젊은 시절부터 볼품없는 외모로 인하여 아테네에서 '못난이'로 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소크라테스는 특유의 에너지와 뛰어난 말솜씨를 내세워 못생긴 외모에도 불구하고 주변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고.</p> <p contents-hash="2d0273e90129fbc64b7aaf567423a7fd8cb1c11f2479fb1035e29137bf82c312" dmcf-pid="yh1otxmepy" dmcf-ptype="general">당시 아테네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연합체였던 '델로스 동맹'의 실질적인 맹주로서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아테네 번성 시기에 성장한 소크라테스는 사상과 학문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소크타레스는 당시의 주류 학문이었던 자연철학이 외부세계의 탐구에 치우쳐 있는 데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는 '인간 내면'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고, 인간의 선과 악,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는 데 집중했다.</p> <p contents-hash="a7f485ccd4d902154068616c9775855264deac0e7db88b75367d4400ebb55d28" dmcf-pid="WltgFMsd3T" dmcf-ptype="general">당시 아테네는 수사학을 연구하는 소피스트(그리스어로 지혜로운 자)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연설과 토론 문화가 한창 활성화됐던 시대였다.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여성 수사학의 대가이자 헤타이라(Hetaira, 고급매춘부)였던 아스파시아를 스승으로 섬기며 논리적인 달변을 습득했다.</p> <p contents-hash="fb8edb214044b4e4fbd7ee9e6fab7854c438735a4f400e505ecd61330fe79aff" dmcf-pid="YSFa3ROJ7v" dmcf-ptype="general">소크라테스가 다른 지성인들과 차별화되던 화술의 특징은 '프로 질문러'였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상대의 어떤 논리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고 대화와 논쟁을 주고받으면서 더 넓고 다양한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인간 내면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본인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강조했다.</p> <p contents-hash="8ff3ba4b953cd83eb842b3e0c6672aaff849e38da1862b9c9583ab048a48478f" dmcf-pid="Gv3N0eIi7S" dmcf-ptype="general">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언변과 인품에 반한 청년들이 하나둘씩 곁으로 모여들어 그를 추종하고 스승으로 모시기를 청했다. 이렇게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된 수많은 인물 중에는, 또다른 대철학자가 되는 플라톤처럼 훗날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거물들도 적지않았다.</p> <p contents-hash="8138195717a9897e3315a2453532c882b0b9c4cbf428bebc6cec92d437d59101" dmcf-pid="HT0jpdCnUl" dmcf-ptype="general">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알키비아데스는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한 미소년이었다. 당시 아테네는 동성애가 성행하던 문화였고, 알키비아데스는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존경하면서도 흠모하여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여러 차례 유혹했다고 한다. 하지만 원칙과 도덕을 중시했던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유혹을 끝내 뿌리치며 스승으로서 제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데만 충실했다.</p> <p contents-hash="fb588c70865cf62da0dd0e05e5ce666293dca12eab90d8acaa33b0ddb6b820d7" dmcf-pid="XypAUJhLph" dmcf-ptype="general">한편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대규모 역병 등으로 아테네에 혼란한 시대가 도래하게 되자, 소크라테스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된다. 당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로 알려지며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지혜로움을 확인하기 위하여 당대에 뛰어나다고 평가받던 엘리트들을 찾아다니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질문 폭격에 끝까지 답을 해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p> <p contents-hash="dd7192c15963949c711bcc2e8c162f6b6b4f177a22d774628b716ec4bb357c32" dmcf-pid="ZltgFMsduC" dmcf-ptype="general">여기서 결국 소크라테스가 찾아낸 해답은 '나는 남들보다 지혜롭다. 그 이유는 나는 적어도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에 대하여 잘 이해야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지혜의 출발점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p> <p contents-hash="7a8b009a222d84db516f4c485fb116548957596ee6f7fa141189ef371aab30ae" dmcf-pid="5SFa3ROJzI" dmcf-ptype="general">'너 자신을 알라'는 명언은 흔히 소크라테스가 만든 어록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이미 그보다 오래전부터 내려져 오던 유명한 격언이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은 이후 소크라테스가 입버릇처럼 이 격언을 주변으로 권유하고 퍼뜨리게 되면서, 사실상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상징하는 유행어로 굳어지게 된다.</p> <p contents-hash="23f4eb5ff8ea9de169d44fe1e19472f31678371cb29330c2a6c50565952679c9" dmcf-pid="1v3N0eIizO" dmcf-ptype="general">이처럼 당대 최고의 논객이었던 소크라테스도 유일하게 말빨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천적이 있었으니, 바로 아내 크산티페였다. 흔히 '악처'의 대명사로도 유명한 크산티페는 실제로 가정에 소홀한 남편을 자주 구박하며 물까지 끼얹을 정도로 성깔있는 여성이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 "잔소리가 심한 여인하고 사는 건 기수가 말 안듣는 준마를 길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아내에 대한 애증의 어록들을 남긴 바 있다.</p> <p contents-hash="a25062d0a19b1b5950c4fd1a0bf4ae9382f644a3d191e6fd2677e7d7182961ca" dmcf-pid="tT0jpdCn7s" dmcf-ptype="general">기원전 416년, 아테네가 중립을 선언했던 멜로스 섬을 침공하여 잔혹한 제노사이드와 인신매매를 자행한 '멜로스 대학살 사건'은 소크라테스에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안겼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조국 아테네가 과연 정의로운 길을 가고 있는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뇌와 회의에 빠진다.</p> <p contents-hash="b822c3b95089650c585bfbd6f7e2dcd2496394991e84bf07f500b0d1c03f5c0e" dmcf-pid="FypAUJhL7m" dmcf-ptype="general">소크라테스가 당대의 소피스트이자 독설가였던 트라쉬마코스라는 인물과 '정의'를 주제로 나눈 1대 1 토론은 유명하다.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하며 '어떤 사회든 통치자가 있고 사회적인 강자인 통치자들이 법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p> <p contents-hash="26f29472ffeb1ae9184ec10ad20d4b05874eaff65ec774c90ab2fb89b07a78e7" dmcf-pid="3WUcuiloFr" dmcf-ptype="general">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특유의 유도식 문답법으로 상대 논리의 허점을 차근차근 공략했다. 소크라테스는 "제대로 된 통치자가 실수하지 않고 통치한다면, 정의는 강자가 아니라 약자의 이익이 될 수 있다"고 강변하며 트라쉬마코스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당시 기득권을 누리던 엘리트들은 소크라테스를 미워했지만, 사회에 불만이 있던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엘리트들을 달변으로 무너뜨리는 모습에 오히려 통쾌함을 느꼈다고 한다.</p> <p contents-hash="e2e13e26e6e1fbda7b01184b03b6ca435c68e755e482197e3c678dd9c46c06b6" dmcf-pid="0Yuk7nSg7w" dmcf-ptype="general">말년으로 접어든 소크라테스의 삶은 뜻하지 않은 사건들에 연이어 휘말리며 꼬이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알키비아데스는 정적들의 위협을 피하여 적국인 스파르타로 망명한다. 아테네는 알키비아데스의 배신으로 인하여 전쟁에서 큰 패전을 맛보며 궁지에 몰린다. 소크라테스에게도 '배신자의 스승'이라는 낙인이 찍히며 불똥이 튀었다.</p> <p contents-hash="952de5dc6a874aca9f5340c7b291b89238709ddb324a9cecb200e54734b65851" dmcf-pid="pG7EzLvazD" dmcf-ptype="general">소크라테스의 시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테네 평의회 의원이었던 소크라테스는, 스파르타의 전쟁 중 마녀사냥에 휘말린 무고한 장군들을 처형하자는 시민들의 요구에 반대하다가 민심을 잃고 골칫거리 사상가로 낙인찍힌다. 결국 유능한 지휘관들을 스스로 모두 제거해버린 아테네는 결국 스파르타와의 전쟁에 무기력하게 패배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된다.</p> <p contents-hash="0db370d4bd81738fe1c760ec63e43e7bffada6921a6c8f7dcfc1dc0ced55bcf2" dmcf-pid="UHzDqoTNzE" dmcf-ptype="general">이후 아테네는 민주주의를 상실하고 친스파르타 세력으로 돌아선 아테네인 30명을 참주로 하는 독재 체제에 한동안 시달리게 된다. 하필 당시 참주 지도자로 악명을 떨쳤던 크리티아스 역시 바로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하나였다. 기원전 403년 아테네인들의 저항으로 크리티아스가 사망하고 참주정권이 붕괴되면서 민주정은 회복되었지만, 어쩌다가 희대의 매국노 제자를 두 명이나 배출한데다 민심에 어긋난 행보를 일삼던 소크라테스에 대한 여론은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다.</p> <p contents-hash="e8d71b0cc26dcca626f1303ff13983f5d0f7fb9fd7ffc5a4b5143d318c6b89d2" dmcf-pid="uXqwBgyjuk" dmcf-ptype="general">아테네 시민들은 위험인물로 낙인찍힌 소크라테스를 '신성모독과 사회질서 문란'이라는 혐의로 고발하여 재판정에 세웠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서 직접 변론에 나섰는데, 반성은 커녕 특유의 거침없는 발언과 도발적인 태도로 오히려 배심원들의 반감을 자아냈다. 심지어 그는 당시 아테네에서 국가 유공자에게 무상 음식을 지급하던 시설인 '프리타네이온에서의 평생 무료식사권'을 요구하는 기행을 펼쳤다. 본래 의도는 소크라테스 본인이 그만큼 자신이 아테네에 필요한 인물임을 강변하려는 풍자적 퍼포먼스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중의 분노만 더욱 돋구는 자충수가 되고 만다.</p> <p contents-hash="76d8efbc3a0a7ab2d6045b16689435f653fc71591e1b1a1685395423b40210e6" dmcf-pid="7ZBrbaWA3c" dmcf-ptype="general">결국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유죄와 사형을 선고받았다. 첫 번째 투표에서 501명의 배심원 중 유죄가 280명, 무죄 의견이 221명으로 비교적 팽팽했는데, 정작 형벌을 결정하는 두 번째 투표에서는 사형에 동의하는 의견이 무려 360표까지 급증했다고 한다.</p> <p contents-hash="2f6efebc5a2324a6e8e84f82211a83afc688984860013ebb2399d6a141f25a11" dmcf-pid="zQNpjHf5zA" dmcf-ptype="general">사형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를 제자와 친구들이 구출해내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들의 제안을 거부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나는 아테네 법을 따라 평생 살아왔소. 나 살자고 법을 어기면 공동체의 질서가 무너질 수 있소. 법을 어기는 건 정의롭지 않소. 정의롭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오."</p> <p contents-hash="800126b1cf9bc4f425b14d79c11f9ed429a23d96c6b7887873bf1801b0abc18f" dmcf-pid="qxjUAX41pj" dmcf-ptype="general">소크라테스가 최후를 맞이하며 '악법도 법이다'라고 옹호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다. 그가 아테네의 법률을 준수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애초에 판결이 악법이라고 폄하하거나, 악법이라도 무조건 받아들여 한다고 주장한 일은 없었다. 후대에서 부당한 판결마저 받아들인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안타까워하며 지어낸 말로 추정된다</p> <p contents-hash="c9b10e30a5435211cd18fcd1fbefb47ca8ef397507c8344a297f3edc6b22f47b" dmcf-pid="BMAucZ8tpN" dmcf-ptype="general">생전 소크라테스는 "나의 철학은 죽음을 연습하는 거였고, 죽음은 철학의 완성이다. 그러니 슬퍼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그는 마지막까지 법과 원칙을 준수했고 '부정의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신념을 지키며 명예롭게 삶을 마감했다. 당시 그의 나이 70세였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육신의 죽음을 뛰어넘은 그의 사상과 철학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까지도 불멸로 남았다.</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한다감, 다이어트 때문에 108배 했다가 "연골 망가져"… 복구 불가 07-30 다음 SOOP 최영우 "플레이디와 커머스 시너지 모색…치지직과의 ‘치킨게임’은 없어" 07-30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