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죽음마저 이용, 다재다능했던 정치 스타의 몰락 작성일 07-16 28 목록 <div id="layerTranslateNotice" style="display:none;"></div> <strong class="summary_view" data-translation="true">[리뷰] tvN 벌거벗은></strong> <div class="article_view" data-translation-body="true" data-tiara-layer="article_body" data-tiara-action-name="본문이미지확대_클릭"> <section dmcf-sid="VkkG9S7v3D"> <p contents-hash="ac403aed2c72aac5fe32a271a9e43c867ed7403d73afe43b190d4942498d61a6" dmcf-pid="fPPkHgvaFE" dmcf-ptype="general">[이준목 기자]</p> <p contents-hash="21a6fd0b2e642cab5cdfd48bd68464625e3f5cea23153db8efb8196888d4211b" dmcf-pid="4QQEXaTNFk" dmcf-ptype="general">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B.C100-44)는 고대 로마의 정치인이자 장군이다. 그는 밖으로는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펼치며 로마의 번영을 이끌었고, 안으로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까지 발휘하여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하다.</p> <p contents-hash="b90485539fcb43f7a8540d6d161b7050b4e0d85b6477b4912ea7fc997cbfc94a" dmcf-pid="8xxDZNyj0c" dmcf-ptype="general">이처럼 다재다능한 당대 최고의 '천재'이자 '정치스타'였던 카이사르였지만, 정작 최후는 비참했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카이사르는 가장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며 칼로 난도질당하는 갑작스러운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권력자이자 인간 카이사르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p> <div contents-hash="3a92d5089443d773020d8ab3165ca4ab83815e16488a6dd61ac174aac707d2e7" dmcf-pid="6MMw5jWAFA" dmcf-ptype="general"> <strong>카이사르의 일대기 조명</strong>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8cf22e2d97f732a04aeb3402a986da5f5ab869b11e0ba6a1982b109a2012d3a0" dmcf-pid="PRRr1AYcFj"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07/16/ohmynews/20250716155402470kcyn.jpg" data-org-width="1280" dmcf-mid="9DXRm8c60r"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7/16/ohmynews/20250716155402470kcyn.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벌거벗은세계사</strong> 카이사르</td> </tr> <tr> <td align="left">ⓒ TVN</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06166d7fa957535a136ecafa691951ff2db453fb89ec67286959cb8ab0745ab8" dmcf-pid="QeemtcGk0N" dmcf-ptype="general"> 15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카이사르는 왜 스물 세번이나 칼에 찔렸나'편을 통하여 카이사르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반기현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div> <p contents-hash="3a27672fb0f79cdda5d5a77d4de494518488ab2ac5f9f6ebb9b2169328e8b478" dmcf-pid="xddsFkHEUa" dmcf-ptype="general">카이사르는 기원전 100년전 로마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카이사르가 태어날 당시 로마는 공화정(BC 509-27)으로 원로원과 시민이 함께 나라를 운영하던 민주주의 체제였다. 로마 공화정은 권력집중과 독재 방지를 위하여 원로원과 민회, 집정관이 오늘날의 삼권분립에 가까운 견제와 균형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p> <p contents-hash="c6d6d4aea43bdea0273dccf46dd01ff5a8abc8062c5347de78e5dc86055a8b02" dmcf-pid="yHH9g7dzug" dmcf-ptype="general">로마의 정치구도는 기득권을 쥐고 있던 귀족파와 권리를 확대하려는 민중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카이사르는 특이하게도 귀족 출신이었음에도 정치적으로는 민중파에 섰다. 카이사르의 고모부인 마리우스가 민중파의 리더였기에 카이사르의 가문 역시 자연스럽게 민중파에 합류했다.</p> <p contents-hash="ed14a3194e2c16074336c11e0f204ad0897f23c71673f3dcaff4df94dc716540" dmcf-pid="WXX2azJqUo" dmcf-ptype="general">기원전 88년, 로마는 마리우스가 이끄는 민중파와, 술라가 이끄는 귀족파로 나뉘어 내전에 돌입한다. 마리우스는 정적인 술라가 소아시아(오늘날의 튀르키예)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로마를 장악하고 집정관에 오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마리우스와 카이사르의 부친이 병으로 잇달아 사망한다. 이에 16세의 카이사르는 민중파 유력 정치인이던 킨나의 딸과 결혼하며 새로운 후견인을 찾고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p> <p contents-hash="f43bdc67a4f5921252e383da4ed868d3b9cec6205b53abe25e703678e8d18214" dmcf-pid="YZZVNqiBpL" dmcf-ptype="general">한편 소아시아 전쟁에서 돌아온 술라는 권력을 회복하고 민중파를 향한 피의 복수에 돌입한다. 술라의 살생부에는 카이사르의 이름도 포함되어있었다. 술라 정권은 킨나의 딸과 이혼하면 살생부에서 제외해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지만, 카이사르는 협박과 회유를 모두 단호하게 거절한다. 술라 정권의 표적이 된 카이사르는 한동안 해외로 피신해야했다.</p> <p contents-hash="0abd33d3428223ce742d31933e812f51a1f7c5a15dd6ea14244731e678f8e507" dmcf-pid="GOOFPH2Xpn" dmcf-ptype="general">기원전 78년 귀족파의 수장 술라가 사망한다. 2년뒤인 기원전 76년, 24세가 된 카이사르는 당시 지중해 최대의 학문중심지였던 로도스 섬으로 유학을 떠나 수사학과 철학을 공부하며 절치부심의 시기를 보냈다. 기원전 69년 카이사르의 아내와 고모 율리아(마리우스의 아내)가 사망하자, 당시 카이사르는 추도연설을 통하여 스스로를 "신성함과 권위를 동시에 가진 존재"라고 자화자찬하며 특별한 가문과 혈통을 이어받은 자신이 민중파 재건에 앞장서겠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전한다. 고모와 아내의 죽음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카이사르의 냉철한 면모와 야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p> <p contents-hash="05f685f1a044c3bf0e939d81d3842693289e183bd5655807b3eaa5fd5f4c0655" dmcf-pid="HII3QXVZui" dmcf-ptype="general">해외에서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은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와 원로원 의원 자격을 획득하고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이 시기 카이사르는 로마의 전쟁영웅이자 술라의 측근이었던 폼페이우스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가 하면, 술라의 손녀와 정략결혼으로 재혼하며 민중파와 귀족파 양쪽의 지지를 모두 끌어모을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마련한다.</p> <p contents-hash="c4855cac84e77baf41fa4657a56399a00f4ccbe8e8561f1c7d9662719e1c42dc" dmcf-pid="XCC0xZf50J" dmcf-ptype="general">또한 카이사르는 로마 최고의 갑부였던 크라수스를 후원자로 삼아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정치적 이벤트들을 단행하며 민심을 얻고 승승장구하게 된다. 기원전 61년,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오늘날의 스페인)의 속주 총독으로 부임하며 현지 부족들을 정벌하고 영토를 확장하며 전공을 세운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에 대항하기 위하여, 자신의 정치력과 폼페이우스의 군사력, 크라수스의 자본력을 결합하여 정치적 담합이자 비공식적인 동맹인 '삼두정치' 체제를 결성한다.</p> <p contents-hash="7fcd083748248f1227ea64ed9644d5918764b7f631f4e6bd66c26239e1a579df" dmcf-pid="ZhhpM541Ud" dmcf-ptype="general">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후원을 등에 업고 41세의 나이에 집정관에 취임한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권력 약화를 위하여 과감한 정치개혁을 단행한다. 카이사르는 의정 활동에 대한 정보 공유과 특권 타파를 명분으로 원로원의 회의록을 공개하게 했고, 공직자의 뇌물 단속을 강화했다. 이어 농지법을 제정하여 지중해 연안의 땅을 로마 빈민들에게 제공하는 정책으로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p> <p contents-hash="7b41482ec7071233a5f940a6204f1deb3ad841c5ca1cf9ecca8e8b311e5b6de5" dmcf-pid="5llUR18tze" dmcf-ptype="general">기원전 58년, 42세가 된 카이사르는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이번엔 임기 5년의 갈리아(현재의 프랑스) 총독으로 부임한다. 카이사르는 8년에 걸친 치열한 원정을 통하여 이탈리아 반도의 2배에 이르는 영토와 약 500만명의 인구를 확보하고 전쟁영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 사건이 바로 카이사르 인생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는 '갈리아 원정(B.C 58-51)'이다.</p> <p contents-hash="5d49a13be60a3fdf2c5bf27fbc1ac0ce6a7ec38d3664084aeb56a1e86a0ccecb" dmcf-pid="1SSuet6F7R" dmcf-ptype="general">카이사르의 독주에 위협을 느낀 원로원은 그가 갈리아 원정을 떠난 사이, 폼페이우스를 적극 부추겨서 두 사람을 이간질했다. 기원전 54년,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요절한다. 또한 이듬해인 53년에는 삼두정의 한 축이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중 전사하며 사실상 삼두정이 무너지게 된다.</p> <p contents-hash="86459da822133b20f30f869d377299a0c633bc141375680b7eb6d0cc941bb55d" dmcf-pid="tvv7dFP3pM" dmcf-ptype="general">기원전 52년,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하고, 갈리아에 있는 카이사르에게는 군대 해산 이후 로마 복귀를 명령한다. 카이사르에게는 사실상 정치적 사형선고가 마찬가지였다. 카이사르로서는 복종하고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명령을 거부하고 로마의 반역자가 될 것인지 선택해야했다. 회군하던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병사들에게 로마로 진격할 것을 선언한다. 당시 카이사르를 묘사하며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로마의 역사사 수에토니우스의 격연도 이 때 탄생했다.</p> <p contents-hash="bc0379fee07f595c3891154fb47eff402845bbaa9916833e2b8ce9d732d36c47" dmcf-pid="FTTzJ3Q0Fx" dmcf-ptype="general">기원전 49년, 로마의 운명을 뒤흔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로마 내전이 시작된다. 각 속주들을 차례로 정복한 카이사르군은 최후의 승부였던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군을 대파한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주했으나, 카이사르의 보복을 두려워한 이집트에 살해당하고 그 목은 카이사르에게 보내졌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적대관계지만 로마의 위대한 장군을 살해한 것을 용납할수 없다며 폼페이우스를 죽인 자들을 모두 처형하게 했다.</p> <div contents-hash="cdc76b48f4d8243070611b2f95a6bc406ab11b34222324f6cb1c6dfb71b6d2c1" dmcf-pid="3yyqi0xpUQ" dmcf-ptype="general"> <strong>'바람둥이'로 유명했던 카이사르</strong> </div> <table align="center" border="0" cellpadding="0" cellspacing="0" contents-hash="9a29dca410665bf614522636ee2850b61f4259c2468f2ef145861e2c5351cebc" dmcf-pid="0WWBnpMU3P" dmcf-ptype="general"> <tbody> <tr> <td> <figure class="figure_frm origin_fig"> <p class="link_figure"><img class="thumb_g_article" data-org-src="https://t1.daumcdn.net/news/202507/16/ohmynews/20250716155404644rmfz.jpg" data-org-width="1280" dmcf-mid="23uRm8c6pw" dmcf-mtype="image" height="auto" src="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7/16/ohmynews/20250716155404644rmfz.jpg" width="658"></p> </figure> </td> </tr> <tr> <td align="left"> <strong>▲ 벌거벗은세계사</strong> 카이사르</td> </tr> <tr> <td align="left">ⓒ TVN</td> </tr> </tbody> </table> <div contents-hash="7d86a644e993c0f05cbfc113e0eefcb2a24264dc5aa77ad776289486abf67f26" dmcf-pid="pbbnhMrRu6" dmcf-ptype="general"> '바람둥이'로도 유명했던 카이사르는 이집트 원정 당시 여성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 7세와 은밀한 관계를 맞게된다. 일설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몰래 몸을 숨겨서 카이사르를 찾아와 유혹하며 정치적 후원을 부탁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클레오파트라는 21세, 카이사르는 무려 52세였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후원자로 이집트 내전에 개입하여 그녀를 이집트의 통치자로 올려놓았다. 또한 이집트를 로마의 속주로 삼는 대신 자치를 보장하고 친로마 왕국으로 만드는데 만족했다. </div> <p contents-hash="b87d41328da10104b89256ae31345e8b1fff69353c7fcd84cbc991d4ba3158e8" dmcf-pid="UKKLlRme38" dmcf-ptype="general">카이사르는 이후 폼페이우스의 잔당과 각지의 반란세력을 평정하고 로마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한다. 기세등등한 카이사르가 로마가 전했다는 짧은 승전보가 바로 그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였다. 기원전 46년 9월에는 네 번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고 돌아온 카이사르를 위한 성대한 개선식이 로마에서 열리고,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에서 최고의 신성과 축복을 상징하는 '월계관'까지 수여받았다.</p> <p contents-hash="4892869a9ce07caf3c2ed3ccdb7d86e82c89ca84e246e1f4457af94237b98fa7" dmcf-pid="u99oSesdU4" dmcf-ptype="general">이제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된 카이사르는 서서히 절대 권력의 맛에 길들여져 폭주하기 시작한다. 카이사르는 국가비상사태에만 한시적으로 적용되던 독재관에 취임하고 본래 6개월이었던 임기를 10년에서 다시 종신까지 늘렸다. 또한 살아있는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화폐에 자신의 얼굴을 새기기도 했는데, 이 역시 공화정에서 금기시해오던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숭배'를 위반한 행위였다. 카이사르가 기존 공화정 체제에서 벗어난 독재자가 되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p> <p contents-hash="5bfb1df7fd6186a69043a1488dfb39745ee1bca0410e24047ec782d52686a827" dmcf-pid="722gvdOJzf" dmcf-ptype="general">하지만 로마 원로원과 정계에서는 이미 카이사르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더 이상 전무했다. 카이사르의 전횡에 위협을 느낀 공화주의자들은 결국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계획을 모의하게 된다. 하필 로마 정치의 상징적 중심지인 원로원 회의장이 암살 실행 장소가 된 것은, 유일하게 무장이 불가능하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권력을 장악한데 방심하여 경호원도 없이 무방비로 회의장으로 들어섰던 카이사르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공모자들의 기습으로 무참하게 난도질당한다.</p> <p contents-hash="9a43bee77b48e291fcf6c221442a95db22688cead73867257966b26537f03414" dmcf-pid="zVVaTJIi7V" dmcf-ptype="general">당시 카이사르의 몸에 새겨진 칼자국은 무려 23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암살범 중에는 카이사르가 아끼고 총애했던 브루투스라는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브루투스에게 카이사르는 로마 내전 당시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기도 했다. 치명상을 입은 카이사르는 하필 자신이 제거했던 폼페이우스의 동상 앞에서 숨을 거뒀다. 카이사르가 숨을 거두며 브루투스를 향하여 유언처럼 남겼다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이야기는 사실 16세기 영국의 작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우스 시저>에 등장하며 알려진 명대사다.</p> <p contents-hash="3687a8fa26ca11221c799929aab1133702f3ef34150b5fce9a07e24267c55b0a" dmcf-pid="qffNyiCn02" dmcf-ptype="general">카이사르 사후, 그의 유언장을 통하여 양자였던 19세의 옥타비아누스가 정치적 위치를 계승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혼란해진 로마를 평정하고 마침내 황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로마 제국의 첫번째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다.</p> <p contents-hash="d73294b1ecc175ba6a9c482edb17489de2a3f5761b06cea672edd940c4f1fc67" dmcf-pid="B44jWnhL79" dmcf-ptype="general">카이사르는 본인이 직접 황제가 오르지는 못했지만 482년간 이어진 공화정 시대의 막을 내리고 제정 시대로 가는 문을 연 인물로 역사에 기록됐다. 카이사르가 철저히 민심과 권력을 잡는데 능한 '독재자'였는지, 아니면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였는지에 대한 해석 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p> </section> </div> <p class="" data-translation="true">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p> 관련자료 이전 펜타곤 후이, 9년 만에 큐브 떠난다 "최근 계약 종료" 07-16 다음 ‘억만장자’ 셀레나 고메즈, 약혼자와 9월 결혼식설…“이틀간 진행될 것” [미지의 세계] 07-16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로그인한 회원만 댓글 등록이 가능합니다.